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승만 정부 (문단 편집) === 긍정적인 영향 ===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나아가야 할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통한 민주적 자본주의 산업강국의 건설을 위해 초석을 놓았고 이를 위한 포석을 놓았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이를 위해 외교면에서 대체로 옳은 방향으로 기초를 잡은 점이 있다. 또한 수십년간 국내를 떠나있었던 탓에 내치나 조직 운영에는 좀 미숙했지만[* 하지만 내치도 마냥 못했다고 할 수만은 없는 게,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해 [[농지개혁법]]을 제정해서 농민들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선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등 업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시할 수 없는 외교 감각을 지녔던 이승만이 외교를 잘한 측면이 많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확실하게 작전권을 넘겨버려서 미국 혹은 UN군이 발을 빼는 건 원천봉쇄하다시피 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시에도 미국과 의회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아는 입장에서 [[반공포로 석방 사건]] 같은 벼랑끝 전술로 아이젠하워 정부의 당면 목표였던 휴전을 훼방놓는 입장을 불사하며 체결을 성공하였다. 이걸로 모자라 아예 미군을 서울과 근교에 잡아두어, [[인계철선|북한이 남침한다면 미본토에서 위원회 통과다 의회 승인, 비준이다 하기도 전에 미군과 교전하지 않을 수 없어 자동으로 미군을 참전]]하게 하는 장치까지 마련하기까지 하였다. 이걸 자주 입장에서 비판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는 데 문제는 이승만은 청년시절에 대한제국이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경술국치|일본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자기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국제법을 믿었던 대한제국이 한미수호조약에 의거해 미국에 일본의 침략을 저지해달라고 요청하는 일행의 통역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미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국을 일본에 넘기고 자기들은 필리핀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이런 쓰라린 경험에다 이후 실제 수십년의 경험으로 이승만은 겉으로 하는 미국의 립서비스에 관계없이 미국으로부터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또다시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 무슨 수를 써서도 이번에는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결국 이를 성공시켰다. 또한 주한미군이 남한에 있듯이 중공군이 북한에 남겠다는 주장도 개소리 말라면서 철회시킨 것도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비단 북한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아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실력을 기르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계속해주고 있는 것도 사실.[[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48094|참조]] 그밖에도 [[농지개혁법]] 등을 제정하고 개정한 것에 커다란 치적이 있는데, 농지개혁이 만약 개정이 안 되었다면 [[한국전쟁]]때 수 많은 농민들이 북한의 토지배분 선전에 넘어가 북한편으로 붙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때문에 농지개혁법은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는데, 농지개혁법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이 다 했지 [[이승만]]은 한 거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봉암]]을 자리에 앉힌 것이 [[이승만]]이니 그의 치적에 역시나 포함된다. 다만, 제대로 법제화가 되기 전에 이미 농촌 수준에서 밀어붙였던 것은 상당한 의의. 일각에선 당시 미국에게 엄청난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와 그 이후의 경제성장을 했다는 재평가가 일고 있기도 한다.[* 삼성이 제일모직, 제일제당을 설립한 것도 이승만 정부 시기의 일인데, 이들 두 회사는 6.25 전쟁 직후의 낙후된 한국경제에서 그나마 수입대체 효과를 통한 산업자립의 기반을 마련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이승만 정부의 최대의 의의는 대한민국이 미국과 동맹한 서방 자본주의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루었지만, 포석 면에서 올바른 방향이었고, 이 구도하에서 이루어진 국력 향상의 혜택을 후손들이 보고 있다. 산업화와 근대화에 뒤쳐져,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했던 대한민국에게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북한 뿐만 아니라 중, 러, 일로부터도 체제를 안정시켜 주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군사비 부담을 대폭 경감하여 결과가 증명하듯이 세계 유수의 산업강국으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다만 친미 외교노선에 대해서 단순히 친미적이었다고만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의 친미 노선은 35년이 넘는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통치에서 막 벗어나고, 이후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된 그야말로 최악의 특수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승만 대통령 본인도 '한국의 생존을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친미일 수 있어도, '미국의 뜻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의미에서의 친미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승만은 자신의 전생애를 통틀어 미국과 마찰을 빚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이전의 여러 남침 징후를 무시하고, 에치슨 선언에다 한국군에 대한 지원에 미적지근했던 미국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키며 미국 대사에게 빨리 미군 참전 안시키면 남한에 있는 미국 민간인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깡을 부리기도 하였다[* 6.25 전쟁 이전 이승만이 제의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요구는 미국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또한 미국은 근본적으로 에치슨 선언에서 드러나듯이 필리핀 일본 얄류산 열도를 잇는 선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남한의 군비는 국경 경비대 수준으로 둘려고 하였다. 장개석 정권을 포기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데서도 나타나듯이 적어도 1950년 전의 미국은 아시아나 한반도에서 육전도 불사한다기보다는 일본이나 대만, 필리핀 같은 섬에 거점을 두면서 해공군으로 미국에 대한 위협을 막으려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이승만은 주한미군 철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진해에 미해군 기지를 유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gunsa/EEB03063N.pdf|#]]] 반공포로 석방만 해도 미국을 제대로 물먹인 사건이라서 미국에서 길길이 날뛰었고 처칠도 열받아서 저런 인간이 통치하는 땅 지켜줄 필요없으니 영국군을 철수시키자는 주장까지 했다. [[에버레디 계획|미국 정부도 멋대로 구는 이승만을 몰아내는 쿠데타까지 획책했었다.]] 종이 위의 구상에서 그쳤지만. 독립운동 시기부터 꾸준하게 반공사상을 주창해왔고, 이로 인해 미 군정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북한은 정부 명칭만 가지지 않았지, 해방 이후 소련의 주둔 아래에 1946년 3월 민주개혁을 주창하며 중앙집권화를 강화했고, 1946년 11월 도, 시, 군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1947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런 위협 속에서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하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이승만은 정치 분야에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물론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전제적인 권위주의적 통치를 했고, 3·15 부정선거와 같은 오점을 남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치제도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확립했다. 그는 대한민국을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제를 모방한 나라로 만들었다. 요약하자면 조선 말,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통해 단순히 국제법이나 이상주의적인 시각으로는 국가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온갖 정치적 공작을 통해서 미국을 잡아두어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했고 이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교로 미국을 잡아두고 안으로는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등 내치는 최악이었다. 또하나 대표적인 예로는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병력이 부족해지자 미군은 구 일본군의 한국전쟁 개입을 구상했는데, 이승만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 일본군은 공산군과 싸우기 전에 먼저 한국군부터 싸워야 할 것이라고 반대했고 뒤이어 중공군의 공세가 좌절되자 결국 무산되었다. 물론 해양순찰이나 기뢰제거에 이승만과 한국정부 몰래 일본군 출신을 투입시킨 사실은 있지만 이 때도 일본군으로 한국 영토에 상륙시키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본군 출신이고, 미군에 소속된 특별부대의 형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